육홍회

대릉원 천마총 경주여행3부

훼브스 2020. 12. 2. 17:29

 

 

2017년6월17일

첨성대 일대 대릉원 부근은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잘 다듬어진 녹색 잔디

무덤군이 대칭으로 여러 개가 남산을 뒷 배경으로

아름답게 있었습니다.

 

대릉원에 입장하게 되는데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데이트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정겹게 보였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하나인 대릉원 지구인데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어 있다 합니다

 

경주시 시가지 중심가에 있는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지역. 이름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부분에서 따 와

대릉원이라고 지었다.합니다.

 

천마총에 입장하였더니 발굴당시

유품들의 모조품이 정교하게 전시되어있고

진품은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친구부부와 천마도 와 서조도

기마인물도에 대하여 안내문을 보며

신라인들의 예술성에 존경을 보냈습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경주 98호분이라고도 한다. 경주시일대에서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1973년에서 1975년까지 발굴을 벌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쪽과 남쪽 2개의 무덤이 있다. 북분에는

여성이 묻혀 있고 남분에는 남성이 묻혀 있다.

 

 

 

 

 

천마총(天馬塚)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고분이다.

지름 47m, 높이 12.7m이며, 1973년에 발굴되어,

천마도(국보 제207), 금관(국보 제188), 금모(국보 제189) 

11,297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 순백의 천마(天馬)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그림이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 밖에 서조도(瑞鳥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도 출토되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해있으며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위키백과)

 

 

 

 

 

 

 

화조도

 

 

 

 

 

천마도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때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障泥흙받이)와 함께 출토된 유물 

채화판(彩畵板나무로 만들어 그림 을 그린 판)’에서

말을 탄 사람을 그린 기마인물도’ 7점과 상상 속의

새를 그린 서조도(瑞鳥圖)’ 5점이 35

만에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총 출토품을 소장 중인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

 최근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특별전에 출품한

천마도 장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특히 채화판의 기마인물도에 등장하는

말은 천마총 같은 장소에서 출토된 천마도

그려진 천마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천마도가 말 그림이 아니라 상상의

 동물 기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을 전망이다.

채화판은 신라의 회화 자료로서 천마도

이상의 중요한 유물이지만 특수수장고에 보관돼

그 동안 실물공개는 물론 조사도 원활하지 못했다.

채화판에 서조(瑞鳥)와 기마인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36년 전 발굴 당시 이미 알려졌었지만

이번 적외선 조사를 통해 정확한 도상 확인과

새로운 그림의 추가 발견이 이뤄졌다.

채화판은 나무껍질 2장을 겹쳐 누빈 개별 판을

팔찌 모양처럼 만든 것으로 윗면에는 서조도와

기마인물도가 있고 아랫부분에는 풀과 꽃을

그린 초화문(草花文), 마름모꼴을

그린 능형문(菱形文)이 확인됐다.

서조도와 기마인물도 모두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것들과 상당히 유사해 당시 삼국간의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이것은 실물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신라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박물관은 이런 새로운 성과를 오는 4일 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리는 제11회 동원(東垣) 학술전국대회에서

유병하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성재현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발표를 통해 공개하기로 해다.

두 연구자는 채화판의 용도를 마구(馬具) 일종이거나

관모(冠帽모자) 부속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조상인기자).

 

 

삼국시대의 과대는 관복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귀금속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신라 왕실과 지배층의 장례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실용적이라기 보다는 장송의례를 위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과대는 얇은 금으로 만든

과판 44개와 띠고리, 띠고리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줄의 드리개[腰佩]를 매달았다.

과판 문양은 좌우대칭의 변형 인동무늬[忍冬文]

이파리무늬[葉文]를 뚫어 장식하였다.

 

 

 

나비 모양 관장식 金製冠飾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 같이 관모의 앞에 꽂기

 위한 장식구이다.

새날개 모양 관장식보다는 크기가 작고, 한 장의

금판으로 만드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뚫림무늬나 달개의 배치 등에서 화려함이

다소 떨어진다.

나비모양 관장식도 새날개 모양과 마찬가지로 모양과

재질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신라의 지방 수장 무덤에서

출토되는 위세품 중 하나이다.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의 관계는 향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천마총 관모(天馬塚 冠帽)는 경상북도 경주시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때 모자이다.

 대한민국의 국보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으로 만든 관()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높이 16센티미터, 너비 19센티미터이다.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다.

금관과 함께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의 하나이다.

이 관모는 모자 모양이기는 하나 머리에 쓰기에는

작기 때문에 가죽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의 윗부분을 장식한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모자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모(金帽)란 금으로 만든 관()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높이 16, 너비 19인 이 금모는

<()> 바깥 머리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위에는 반원형이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진다.

아랫단은 활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양끝이 쳐진 상태이다.

윗단에 눈썹 모양의 곡선을 촘촘히 뚫어 장식하고

사이사이 작고 둥근 구멍을 뚫었으며, 남은 부분에

점을 찍어 금관 2장을 맞붙인 다음 굵은 테를 돌렸다.

그 밑에는 구름 무늬를 뚫어 장식하였고

또 다른 판에는 T자형과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의 금판이 있다.

머리에 쓴 천에 꿰매어 고정시킨 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천마총 금관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1978 12 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고분 제 155호에서 다른 껴묻거리들과 발굴되었다.

이 당시 천마도와 함께 발굴되어 고분 제 155호가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으며

다른 금관들과는 다르게 무덤의 주인이

쓴 상태로 발굴되었다.

신라 금관 중 가장 화려하다. 또한 황남대총

금관과 금령총 금관과 비슷한 형태로 되어있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3개의 나뭇가지 모양과 2개의 사슴 뿔 모양이

금관 테에 달려 있고 금관의 앞 부분에는 옥과

달개가 달려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의 끝에는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달개(드리개)는 나뭇잎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관의 테두리에는 위아래에 연속점무늬와

물결무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 ? ~ 284, 재위: 261 ~ 284)

신라의 13번째 임금이며, 김씨로 임금이 된 첫째이다.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김알지의

6대손으로 어머니는 지마 이사금의 손녀이자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김알지의 5대손(세한-아도-수류-욱보-) 구도(仇道)이다.

비는 석씨 광명부인(昔氏光明夫人)이다.

 

첨해 이사금이 죽은 후(261년 음력 12 28),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266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으나 성주

직선(直宣) 2백 기를 몰고 격퇴하였다. 272

음력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278년 음력 10월에는 백제가 귀곡성(槐谷城)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했다.

미추이사금은 또한 농업과 민생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여, 264년 가난한 자들을 위문,

구제하였고 268년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 민중들의

불만사항을 수렴했고, 272년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에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이사금이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281년 음력 9월 양산(楊山) 서쪽에서 병사를 시찰했다.

283년 음력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음력 10월에

괴곡성을 포위,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