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와노래

이천지방 거북놀이 창부타령(5부4)

훼브스 2020. 8. 2. 18:55

 

 

 

 

 

 

 

 

 

이곳 이천은 옛날부터 기름진들녁으로 임금님 수라상에 제일먼저 올랐다는쌀과 좋은인심으로 평화로운곳이다.추석이오면 여러 동네에서 축제가 벌어지는데 서로 서로 초대하여 이웃마을의 문화행사에 적극 참석하므로 추석 지난 보름까지 흥겨운 놀이의 연속이었다.지금 수진리 공터 가설무대앞 멍석위에 여러동리에서 구경온 총각처녀들은 노래를들으며 서로의 인물탐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야!!!!!!!!! 이쁘다..노래도 잘하네!!!!!!!!!민식이는 침을 꿀꺽삼켰다.같은 面 이라지만 끝에서 끝이 인지라 친구들과 어울려 20여리를 걸어 왔던것이다. 민식이 지금올라와 노란샤쓰입은사나이를 열창하고 있는 명자를 본순간 그만 숨이 탁막히고 말았다 하는 것은 백열등에 반사된 하얀얼굴이 너무 이쁜것이었다.노래자랑이 끝나고 입선한 명자에게 닥아간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저 낼모래 낼모래는 저희 동리에서 연극을 합니다 부디 오셔서 구경좀 하여주십시오""네 이야기 들었어요 꼭가야지요 재미있을 거야요""제이름은 김""알고 있습니다 사촌 여동생이 제친구라는거 모르셨어요?? 특작농사로 유능한 총각님이라 소문이 나있던데요 호호"방축리에서 준비한 신파 연극에서 민식이 맞은 역은 형사역이였다 몇일을 두고 대본을 외고 연습을 해왔지만 어색한 대화의 책 읽기식 이었고 소도구 또한 형편이 없었음은 형사역의 권총은 목총을 검정칠을 해서 화약을 장전한다음 고무줄 압축으로 소리가 나게 만든 것으로 ..그날 큰말 잔디밭 가설무대에 이웃동리에서 구경온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북놀이와 농악놀이로 흥이 돋거지고 어둠으로 횃불이 올라 막이올랐을 때 민식은 명자의 얼굴이 와 있나 열심히 찾고 있었고 사촌누이와 몇몇의 처녀들이 그들과 어우러져 있는 것을확인하고는 더욱더 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잘못된것이었다몇번의 막중에서 중절모와 바바리의 멋진폼으로 그들의 주목을 받았것만.비극이 희극으로 반전되고 자신이 웃음꺼리가 될줄은 처음부터 몰랐던 것이었다.마지막 여주인공을 구하려 악한에게 겨냥한 목총에서 화약이 떨어져 버렸던 것이었고 얼떨결에 줏어올려 재장전한 화약은 또 떨어지고 방화쇠는 당겨지는 바람에 악한은쓸어지고 그것도 모른체 다시 화약을 줍는사이 악한으로 분한 경필은 소리치고 말았는데.

 

"나 죽었어"

 장내는 웃음 바다가 되었고 추석의 둥근달 밑에서 명자의 하얀얼굴이 웃음에 입이 찢어지는 것을 무대에서 보고야 말았던것이었다.그들은 결혼식장에서 말하고 있었다."여보세요 만약 가슴에 단꽃이 떨어지더라도 줏을생각을 마세요""후후 보름달 둥근달이 명자씨가 웃는 모습을 보며 내게 말해주더군

 명자는 널사랑하고 있다고"  지금은 볼거리 놀꺼리 많아 그런문화 행사가 없겠지만 추석

 

보름달 만은 크기는 같을 꺼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는 한국 전통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거북놀이는 주로 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추석날 저녁에 동리의 여러 잡귀·잡신을 쫓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행하는 놀이이다. 아이들이 수수댓잎을 새끼로 엮어 거북의 모양을 만들어, 앞에 한 사람, 뒤에 한 사람 모두 두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서 마치 거북이가 돌아다니듯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을 추며 논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모두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거북을 몰고 다니는 이가 "이 거북이가 동해바다를 건너오느라고 힘이 지쳐 누웠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시오"라고 한다. 그러면 그 주인은 송편··과일 등의 음식을 한상 차려 내놓는다. 그것을 먹고 나면 또 거북이를 모는 이가 "거북아, 먹이는 나왔으니 인사나 하고 가자"라고 한다. 그러면 거북이는 이때 주인을 향하여 넙신 절을 하고 또 한바탕 춤을 추며 놀다가 다른 집으로 가는 것을 반복한다. 출처:위키백과

 

나옹 스님의 孝心

<이천·영월암>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의 유명한 스님 나옹화상(법명 ??, 1320∼1376)은 춘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길을 시자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지금의 양주땅 회암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이천 영월암이 있는 설봉산 기슭을 오르는 스님의 발길은 찌뿌듯한 날씨처럼 무겁기만 했다.이때였다. 어디선가 가까이서 울리는 요령소리가 스님의 귓전을 울렸다.『허, 또 누가 이생을 하직한 게로군.』자신의 출가 당시 화두였던 사람이 오고가는 생사의 도리를 되 뇌이면서 막 산모퉁이를 돌아서려던 나옹 스님은 초라한 장의 행렬과 마주쳤다.상여는 물론 상주도 없이 늙수그레한 영감이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를 구슬피 메기고, 그 뒤엔 장정 하나가 지게에 관을 메고 무거운 듯 힘겹게 걷고 있었다. 바로 뒤엔 두 명의 장정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따랐다.행렬은 스님을 보자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허리를 굽혔다. 『누가 갔는데 이처럼 의식도 갖추지 못하고….』『예, 아랫마을 돌이 어멈이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습니다.』『거참 안됐구먼. 얼마 전 아들을 잃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더니… 나무 관세음보살.』

스님은 마지막 가는 돌이 어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염불을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평소 마을을 지나다 몇 번인가 본 돌이어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난 뒤 충격을 받아 남의 집 물건을 예사로 훔치고 자주 마을 사람들과 싸우는 등 포악해졌다. 처음엔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도 나중엔 하도 말썽을 부리니까 가두어야 한다고 하여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그만 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었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마음마저 착잡한 스님은 문득 출가 전 자신이 고뇌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스님이 스무살 때였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약속한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비통에 잠긴 나옹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어른들께 수없이 되풀이했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벗과의 사별을 인생의 근본문제로 받아들인 나옹은 그 길로 공덕산 요연 스님을 찾아갔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으나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이 말에 요연 스님은 나옹의 공부가 보통 경지가 아님을 알았다.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 나옹은 그곳을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그러나 스님은 더 높은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 1347년 중국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 연경 법원사에 도착하여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계오(契悟)했다. 2년간 공부하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 처림에게 법의와 불자를 받고 사방을 두루 다니며 선지식을 친견하던 스님은 어느 날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솟아올랐으나 스님은 출가사문의 본분을 내세워 멀리서 왕생극락을 기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어머니 생각을 모두 떨칠 수는 없었다.그날 밤 스님은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행적을 좇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옹 스님의 어머니 정씨는 뜻밖에도 환생하지 못하고 무주 고혼이 되어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스님은 자신을 원망했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했던 자신의 불효가 한스러웠다.「자식이 출가하면 구족이 복을 받는다는데 우리 어머님은 업장이 얼마나 두터우시길래 구천을 맴돌고 계실까. 혹시 아들의 모습을 못 보고 눈감으신 정한이 골수에 맺힌 것인 아닐까?」스님은 지옥고에 허덕이는 어머니를 제도한 목련존자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천도하기로 결심했다.나옹 스님은 영월암 법당 뒤 설봉산 기슭 큰 바위에 모셔진 마애지장보살님 앞에서 어머니 천도 기도를 시작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지옥의 한 중생까지도 제도하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나옹 스님의 독경은 간절했다.그렇게 기도하기 49일째 되던 날, 나옹 스님은 철야정진에 들어갔다. 새벽녘 아직 동이 트기 전, 나옹 스님은 지장보살님의 전신에서 발하는 환한 금빛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눈부신 자비의 방광이었다.스님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지장보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장보살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듯했다. 고통받은 지옥 중생 때문에 지옥 문전에서 눈물이 마를 새 없다는 지장보살님이 어머니를 천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아, 지장보살님께서 내 기도에 감응하시어 눈물로써 화현하고 계시는구나.」나옹 스님은 기도가 성취되어 기뻤다. 『어머니, 이제 아들에 대한 섭섭하신 마음을 거두시고 편히 극락에 드십시오.』

기도를 마친 나옹 스님은 선실에 입정하여 이미 천도왕생하신 어머니를 보았다. 그 이후부터 영월암 지장보살님 앞에는 선망 부모의 왕생극락을 빌면서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려는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나옹 스님은 영월암에서 14안거를 성만하면서 후학을 제접하고 신도들을 교화했다. 이 마애지장보살상은 지난 1984년 12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됐다.

영월암(映月庵) 설봉산 기슭 이천시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 (義湘大師.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하고 산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하나 이를 뒤받침할 만한 실증적 자료가 없어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또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영월암은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는 사세가 꽤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려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물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53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월암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산에 있는 어떤 사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후 조선영조의 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감수한바 있는 신경준(申景濬 1717∼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북악사가 보이고 있다. 거의 비슷한 때인 1799년(정조23)에 정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1760년(영조36)에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 (與地圖書) 에도 역시 북악사라고 이름이 보인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영월암(북악사)은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 그 사세가 알려지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모습을 역사속에 다시 드러내고 있다. 774년(영조50)에 영월대사(映月大寺) 낭규(朗奎)가 북악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 영월암이라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천문화관광-

 

 

 

 

 

 

 영월암 에서 아이들 어릴때 친우들과 함께

 

 

 

이천 산수유 축제

 

 

 

원적산의 설경

 

 

설봉호수의 물오리 

 

 

창부타령 경기민요 이춘희 양금석